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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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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한 옥타비아누스는 군중을 안심시키려는 목적으로, 앞으로 알렉산드리아를 관대하게 대할 이유를 알리는 연설을 그리스어로 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렉산드리아의 아름다움과 부, 그곳을 세운알렉산더에 대한 존경,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인 그저께 이오스와 나운 우정이 그 이유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안틸 루스와 케사 리온을 찾아 도시를 살샅이 뒤졌다. 스승에게 밀고당한 안틸 루스는 카이사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세운 사원에 피신해 있다가 그 자리에서 참수당했다. 그러나 케사 리온은 어머니가 준 엄청난 은을 갖고 인도 쪽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비탄에 찬여왕

옥타비아누스의 허락을 받아 안토니우스의 장례를 치른 클레오파트라는 정복자에게 당할 모욕을 피해 죽기를 결심했다. 무장해제당한 채 감시를 받던 그녀는 식음을 전폐했다. 죽어 가는 안토니우스 앞에서 입은 상처가 곪아 갔다. 그녀는 점점
쇠약해 갔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런식으로 계속하면 그녀의 자녀들을'수치스럽게'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음식을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녀를 찾아왔다. 디온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이 마지막 회담에서 그를 유혹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다정한 말들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정숙한 옥타비아누스는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 루부 타르 크는 창백하고 야원 환자의 몰골로는 유혹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녀는 그의아내와 처제에게 줄 보석을 제공해 동정심을 사고자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녀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기를 원하는 줄로 알았다.

동방을 주제로 한19세기의 그림에는 능에 침입한 로마인의 눈에 비친 죽음의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여왕의 옷을
걸친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옆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충실한 두 하녀 이라스와샤르 미온이 있었는데, 샤르미 온은 쓰러지기 직전 여왕의 왕관을 바로잡아주었다.

 

신비로운 죽음

그러나 여왕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였다. 로마행을 3일 앞두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한 뒤.
충실한 하녀인 이라스와 샤르미 온을 시켜 목욕을 하고 여왕답게 성장을 했다. 최후의 성찬을 마치고 여왕 은옥 타비 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곁에 묻어 달라는 요청을 쓴 전갈을 보냈다.

 

서둘러 사람을 보냈으나 이미 그녀는 숨을 거둔 뒤였고,이라스와 샤르미 온 역시 그녀 곁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의사와
독약 전문가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보석에 숨겨진 독바늘에찔려 죽은 것일까? 아니면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일까? 여왕이 죽기 몇 시간 전, 어느 농부가 무화과가 담긴 바구니를 가지고 여왕의 처소를 찾았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 바구니에 뱀이 숨겨졌었는지도 모른다.

 

39세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자유를 택했다. 그녀는 아르시노에가 걸었던 길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경계를 잠재웠던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화가 났지만, 그녀를 안토니우스의 무덤 근처에 묻어 주었다. 그 무덤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그는 다른 조각상들은 다쓰러뜨렸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측근인 아르키비우스가 위탁한 거액을 받고 여왕의 초상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릭상스가 19세기 동방의 장식물(표범가죽, 이집트식 가구와 장신구)을 사용했다면, 프린셉의 그림은 역사적 사실에 좀 더
충실하다. 그는클레오파트라가 속해 있는데 문화권, 즉 그리스와 이집트적인 요소를 혼합하여 활용하고 있다.

 

여왕과 샤르미온의 우아한 자태와 따뜻한 톤은 마치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장례식
장면을 담은 것으로 순전히 상상적인 그림이다.

 

고대 로마 유적
안토니우스 관련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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