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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나라

악티움, 거인들의 대결

옥타비아누스는 보병 7만 명과 기병 1만 2,000 명을 이끌었고, 함대 400척은 명장 아그리가 지휘했다. 외관상으로는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현저히 우세했다. 

 

악티움, 거인들의 대결

병사가 7만 5,000명에보충대가 2만 5,000명, 기병대가 1만 2,000명 합류했고, 군함 500척 중 200척은 이집트 소속이었으며 화물선이 300척 뒤따랐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진홍빛 돛을 단 사령 관용 배 '안토니아'호에 올라 60척의 배로 이루어진 개인 함단을 지휘했다.

 

두 군대는 에페이로스 남쪽 암브 라키 아만에서 마주쳤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모두악티움곶에 진을 치고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 첫 교전으로 아그리파가 주변 섬을 모두 점령하자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군수품 보급이 끊겼다. 군대가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트라케와 파플 라고니아의 왕들이 옥타비아누스 측에 가담한 데다 델리우스가 전투 지도를 들고 적에게 합세해 안토니우스 군대는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최소한으로 축소된 함대로 포위망을 뚫는 일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무거운 짐 때문에 속력을 낼 수 없는 화물선과 조그만 군함들을 불 지르고 귀중품들은 여왕의 배에 실었다. "그들은 가장 좋은 배만을 골라 비밀리에 귀중품들을 실었다."라고 디온 카시우스는 전한다. 

 

남은 240척의 배들은도주를 위해 돛을 높게 걸 준비를 했다. 해상에서 도주 준비를 하는 동안 육군은 카니디우스가 맡았다. B.C. 31년 9월 2일 정오 무렵, 4일간의 폭풍이 잦아들고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날개 대형으로 정박해 있던 세 함대가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뚫기 위해 움직였다. 이때 아그리파가퇴각하자 안토니우스 함대의 우익을 맡은 푸블리콜라의 함대가 그 뒤를 쫓아가는 바람에 균형이 깨지고 말았다.

 

아그리파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안토니 우스의 함대를 공격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흩어지고 말았지만, 후방에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단은 그 틈을 이용해 넓은 바다로나갔다. 5단 노가 달린 배에 탄 안토니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그녀를 쫓았다. 그렇게 하여 100여 척만이 간신히 도망쳐 나올수 있었다.

패배? 승리?

옥타비아누스의 선전물과 고대 역사서들은이 대결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압도적이 고완 전했으며 신들과 자연이 이미 그렇게 걸 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집트 여인은 기진맥진하여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으며"(디온 카시우스) 정임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그를 망처 놓은 여인을 위해 자신에게 목숨을 바친 자들을 버리고 배신했다. 완진한 패배 있다."(플루타르크)

 

"거대한 함대의 잔해가 바다를 떠돌았고 아랍과 시바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탈취한 전리품들이 바람에 끊임없이 밀려왔다."(플루타르크) 로마인들은 이 전쟁을 내전'이 아닌 '정당한 전쟁'으로 간주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천명했듯이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로 마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인이란 생각을 경계하라. 그는 이집트인이다! 그를 안토니우스라 부르는 것도 경계하라.그는 세라피스(이집트의 신)이다! 그가 한때 집정관이었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그는 체육회를 주판한 사람이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이 전쟁은 동방에 대한 서방의 승리, 방탕에 대한 덕성의 승리, 동방의 왕국에 대한 로마 공화국의 승리 있던 것이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합류했다. 보물들 도무 사했다! 반은 거덜이 났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및을 빠지
나오기는 한 것이었다. 이집트의 전통적 상징인 악어를 로마 배의 선미에 장식해 로마 해군 병사들의 발아래
놓음으로써 옥타비아누스의 깨끗한 승리를 상징했다.

로마인들은 육지에서는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으나 해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늘 해상전을 육상 전처럼
치르려고 했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코르부스, 주갈 고리이다. 이들은닐빤지처럼 배와 배 사이에 갈고리를 걸어
접근한 다음 육탄전을 벌이곤 했다. 악티음 해진 이후 해군의 중요싱을상비 해군 함단을 조직하여 민간 수송 신다
상인들을 보호하록했다.

 

죽음의 동반자들

여왕은 패배자의 모습으로 이집트에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대신 꽃 줄로 장식된 그녀의 배는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들어갔다. 그녀는 신속하고 기운차게 권력의 고삐를 다잡았으며 반역의 혐의가 있는 모든 사람을 처형했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가만있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낙담한 안토니우스는타이 나론 곳에 이르는 3일동안 "뱃머리에 올라두 손으로 머리를쥐어뜯었다."(플루타르크)한참 뒤 침묵에서 벗어난그는 클레오파트라와어울려 생기를 되찾았다.그들은 자신도 모르게죽음을 향하고 있있다.

타이나론곳에 닿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악티움곶에 있던 육군은 옥타비아누스가 관용을
베푼다는 약속을 받고 그에게 투항했으며 버려진 배들은 대부분 불타 버렸다. 무력한 처지를 깨달은 안토니우스는 몇몇 모임이라는 세로운 충직한 친구들에게 사례 물을 주고 해산시켰다.

 

키레나이카(리비아의 동부)에 주둔한 4개 군단에 기대를 걸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리비아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향해 계속 항해해 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키레나이카에 있던 군대가 변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나 친구들의 만류로 간신히 살아난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그는 무력감에 빠져 항구 근처에 독방을 짓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아테네의 염세주의자 티몬을 기려 독방을 티모 네이온'이라 이름 붙였다. 그에게 다시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는 온 힘을 기울였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풀비아 사이에서 난 안틸 루스의 성년복 착의를 기념하는 축제, 케사 리온의 이름이 청년학교 목록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축제, 안토니우스의 53회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 등 온갖 축제를 거듭해 열었다. 

 

활력을 되찾은 그는'모방할 수 없는 삶의 동반자가 아닌 '죽음의 동반자들'이 될 사람들의 모임에 합류한다. 이들은
함께 죽기로 약속하고 마지막 즐거움을 나눈 일군의 벗들을 말한다.

 

안토니우스 동상
안토니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