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최적 상황이다, 도내체 이것이 부슨 뜻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고용 주의 노동자의 운명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임금과 고용의 다른 수준은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이와 다른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균형에서 벗어나는 임금, 고용상황은?
달리 말해서 이는 균형에서 벗어나는임금-고용 상황을 상상하는 새로운 조물주(구체적으로 공산당이나 사회당 정부를 의미한다)가 있다면, 그가 이 상황과 균형 상황을 비교해보았을 때 균형에서 벗어나는 임금-고용상황은 필연적으로 한 당사자나 때로는 양측 모두의 복지를 감소시킨다는 말이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더 높은 임금 수준에서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상황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임금-고용 수준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고용량을 가지고 계산하든 균형임금보다 높은 새로운 임금 수준을 고용자에게 적용한다면 이윤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명한이치다. 하지만 임의적으로 결정한 이 새로운 고용 수준을 균형임금으로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고용주들은 균형 상태에서보다는 적은 이윤을 챙기게 된다. 왜냐하면 고용주들이 특정 임금 수준에서 자기들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고용 수준으로 선택한 것이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던 고용 수준을 결정하는 균형점보다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한다면 고용주들은 균형 상황에 비해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노동을 제공한 매 시간으로 벌 수 있는 소비량
반대로 임금이 균형점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면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손해를 보게 된다. 이것은 고용 수준이 어떻게 결정되든지 마찬가지이다. 더 낮은 임금이란 노동을 제공한 매 시간으로 벌 수 있는 소비량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말하면 고용 수준이 어떻든 이 새로운 임금 수준에서 노동자들의 만족도는 균형점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도보다 작다는 것이다. 이 역시 자명한 이치다. 게다가 다른 고용 수준에서는 균형임금을 적용해도 노동자들의 만족도가 줄어드는데, 그 이유는 균형임금에서의 고용 수준이 최대한의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균형점에서 이탈하는 임금 수준은 적어도 양측의 한 당사자에게는 불만족스럽다. 그렇다면 균형임금에서 다른 고용 수준은 가능할 것인가? 이 가능성은 빨리 제외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균형점에서의 노동시간과 고용 수준이 기업의 이윤과 노동자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수준의 고용은 양측의 상황을 모두 악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균형점의 임금과 고용 수준반이 최적의 상황을 계공 한다고 볼 수 있다, 열싸 안고 춤이라도 추이야겠다. 이 얼아나 완벽한 세상인가? 시장이 최적의 노동량과 임금을 걸 경하는 기적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만일 이러한 균형 상황을 뿐 화 시키면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게 될 것이다.
또한 상상 가능한 그 어떤 노동시간에서 출발하더라도 40,000시간의 노동량을 결정하는 사안은 사회 전체에서 만장일치로 찬성받았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반대표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얼싸안고 춤을 춰야 한다. 더 이상 투표하러 갈 필요도 없지 않은가? 시장이 민중의 목소리를 즉각적으로 내고 있으니 말이다.
경제학의 이러한 과학적 중명이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얼마나 짓누르고 있는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거듭 말하지만 고용 부문에서 경제적 자유주의는 그 어떤 다른 기초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모든 것이 앞에서 설명한 부분에 있다. 이대단한 지적 건축물에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신앙과 정신적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는 우연하게(가족이나 친구의 영향으로, 야심 때문에, 또는 국가에 대한 선험적 부정 때문에) 자유주의자가 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확신을 강화하기 위해 인센가는 들이 다보게 되는 성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비참한 빈곤의 모습이 시장의 실패를 보여줘서 자유주의의 지적 횃불이 혼 들릴 때마다 이와 같은 유일한 빛의 보루에서 에너지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완전고용은 최적이고 시장은 완 건고용을 창출하니까, 시장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자. 만일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장을 창조하자!
이만큼 설명했으니 이런 이론적 관점에서는 실업에 대한 설명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지 즉각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시장이 즉각적으로 완전고용을 창출한다면 실업은 시장에 문제가 있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시장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시장의 작동을 방해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론가들이 이 누군가 에게 다양한 마스크를 씌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항상 지목하는 것은 바로 임금노동자의 마스크를 쓴 사람이다. 시장을 방해하는 그 진짜 '누군가'가 임금노동자라는 말이다.
제시한 명제의 깊이에 대해
실업에 관한 이론을 살펴보기에 앞서 여기서 제시한 명제의깊이에 대해 몇 가지 덧붙이면서 이 장을 마치려고 한다. 자유주의 사상은 앞의 명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시장의 법칙'을 노래하는 옹변대회에서 자신에게 스스로 우수상을 부이하는 자들은 모두 이 명제에 기대고 있다.
첫째, 우리가 제기해야만 하는 좋은 질문은 과연 위와 같은 노동시장이 존재하는가이다. 특히 완전고용을 즉각적으로 만들어내는 임무를 시장에 맡기기 위해서는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시장이 존재하거나 만들어지기 위해서 얼마나 황당한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독자들에게 권고한다. 이렇게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장의 존재 여부에 대한 이런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가들은 시장을 변호하기 위해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화, 추상화, 가설 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변명할 것이다. 좋다. 우리는 항상 마치 ~처럼이라는 태도로 임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처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실증적 적절성을 전혀 갖지 못한 이 훌륭한 지적 건축물은 하나의 철학일 뿐이며, 일부 사람들이 세상에 강요하려고 하는 실천적 신화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인데 그 옹호자들은 이런 분석을 가장 지독한 비난으로 생각한다.
2022.05.25 - [분류 전체보기] - 빛과 어둠 사이에 존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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