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나라

불안정한 결합

반응형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아테네에서 B.C. 39년 가을부터 B.C. 37년 봄까지 머문다. 안토니우스는 체육대회의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심판을 보기도 하면서 즐겁게 생활했다. 그곳에서도 안토니우스는 '새로운 디오니소스로 칭송받았으며, B.C. 38~39년 겨울에는 아테네의 여신인 아테나 폴리아스에게 바치는 제전에 참여했다.

 

불안정한 결합

또한 그는 아테네인에게 연회를 조공으로 치러졌다. 그동안 파르티아 군대와 치른 싸움에서 두 차례 리비아와 결혼한 옥타비아누스로 인해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었다. 옥타비아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전쟁을 모면한 세 집정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B.C. 37년 여름 타란토에 모여 삼두 집정 시대를 5년 더 연장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
초상이 담긴 메달을발행했다. 메달은 대내외적으로 두 사합! 선전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앞쪽은 여왕을, 뒤쪽은 장군을 담은 이 메달에서 두 사람이 비슷하게 그려한 점이 홍미롭다. 그때,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죄악,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랑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를 임신중인 옥타비아를 두고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B.C. 37년 가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점령한다. 그가클레오파트라에게 가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와 관계를 재정립한 후 파르티아 대원정을 노렸던 것일까? 어쨌든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에서 만나 로마와 달리 일부다처(일처다부)를 허용한 이집트 의식에 따라 결합했다. 새로운 통치시기를 맞이한 클레오파트라는 월계수와 실편백(월계수는 승리의 상징이고 실편백, 즉 사이프러스는
애도의 상징이다)으로 유명한 다프네거리에서 안토니우스와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신의 야심을 버리지않았다. 그녀는 이 김트에 인접한 지역인 코엘 레-그들은 이제 헤어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들의결합은 쌍둥이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들에게는 알렉산더, 딸에게는 클레오파트라란 이름을 주고 각각 해(헬리오스). 달(셀레네)이라는 별칭을 주었다. 그는 후대에 가면 왕들이 그들을 위해 여러 자리를 마련해 주어 이 고귀한 가문이 더욱 번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첫 부인이 낳은 딸하나와 풀비아가 낳은 아들 둘, 그리고 나중에 옥타비아에게 딸 둘을얻는다. 시리아와 유대 땅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칼키스 왕국, 시리아 해안, 키프로스 등지와 실리시아, 크레타, 유대지방의 몇몇 지역만 할당해 주었고, 헤로데에게는 아리카 시의 징세 책임까지 맡겼다. 클레오파트라가 적대감을 가졌지만(어쩌면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관문에 해당하는 이 봉건 영토를 로마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파르티아와 치른 처참한 전쟁

클레오파트라의 강력한 군사적, 재정적 후원을 받은안토니우스는 B.C. 36년 봄에 시작하게 될 파르티아 원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유프라테스강까지 배웅하고, 승리의 여왕으로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유대 지방을 지나 이집트로 돌아왔다.거기서 헤로데가 암살을 획책했다가 포기하고 오히려 이집트 국경의 펠루시움까지 그녀를 모셔 선의를 표했다고 한다.

 

새로 소유하게 된 영토를 방문한 여왕은아리카에서 꺾꽂이해 온 발삼 향나무를 헬리오폴리스에 심게 했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면서 여왕은 자신의 성공을 기념하는 금화를 씩도록 했는데, 금화에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스 세계의 이집트의 관문에 해당하는 새로운 수권자로서, 아프로디테와 디오니소스, 그리고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살아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 나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식에게는 모계인 이집트 조상의 표시를 좋아하고 열렬한 헬레나를 더 많이 남겼다.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프톨레마이오스 필라 델프라고 지었다. 안토니우스의 마지막 자식인프톨레마이오스 필라 델프가 진정한 라지드 왕가의 아이가 된 것이다.

 

한편 패전을 거듭한안토니우스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퇴각을 감행해야 했다. 병사의 상당수 가이질과 기근, 유대 땅에서는 해로데대왕이 B.C. 40년부터 유대인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대규모의 축조를 옹호자였던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원로원을 개입시켰다. 파르티아 사수의 화살에 죽어 갔다. 보병 2만 명과 기병 4만 명을 잃고 진군은 시리아에서 종료되었고, 거기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원조를 기다렸다. 병사들 은거지 꼴이 되었지만 안토니우스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 플루타르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위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안토니우스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은 대단히 확고하여 안토니우스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후덕함과 관대함, 뛰어난 사교성,돌보는 극진함, 이 모든 것들이 어찌나 지극했던지 아픈 병사들이 성한 병사들보다 더 충성심이 강하고 그에게 목숨을 바치려고 들 정도 었다. 식량과 의복과 돈을 가지고 도착한 여왕은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가는 길에 생존자들을 데리고 갔다. 점잖은 성품, 웅변력, 천성적인 소박함, 다친 병사를 구하고 클레오파트라는 헤로 데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플라비우 스은 그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안토니우스에게 혜 로데를 죽이도록 설득했다. 고전한다. 그러나 그 일 은허사였다. 혜로 데는 근방의 불안정한 국경지대에서 로마의 귀중한 동맹이었으며, 안토니우스도 파르티아 원정을 꾀하기 위한 지방 거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유대 외동 쪽에 위치한 파르티아는 BC. B 년 자기 땅에 밝을 들인 로마 장군 크라수스에게 모욕적이 선임 혹한 패배를 안긴 이후정 차 위험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집트 피라미드
이집트 피라미드

반응형

'정보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렉산드리아 할양  (0) 2022.05.12
클레오 파트라의 대외정책  (0) 2022.05.11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0) 2022.05.09
동방의 군주  (0) 2022.05.08
클레오파트라의 승리  (0) 2022.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