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귀환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많은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 시노에의 사주를 받은 찬탈자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행세를 하여 혼란을 야기시키는가 하면, B.C. 42년과 41년에는 나일강의 물이 말라 기근과 페스트가 번졌다. 그러나 여왕은 무엇보다도 국제 정세에 신경을 써야 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충돌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펼치는 이집트 정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고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는 어머니 곁에서 파라오로 등극했다. 그리하여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이 유일무이한 통치자가 되었다.
분열된 로마, 그리고클레오파트라의 현명함,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가 합법적인 후계자로 지목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충돌했다. B.C. 43년 4월 21일 내전 끝에 안토니우스가 모데나에서 패함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지만, 공화파를 중심으로 외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암살 가담자들로 군대와 함께 동방에 피신해 있었다. 브루투스는 마케도니아에, 카시우스는 시리아에 머물면서 카이사르 파인 돌라 벨라 장군과 대립했다. 로마의 내분은 차츰 이집트에 영향을 미쳤으나 클레오파트라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그녀는 공화파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거부했다.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한 로마군이 카시우스측에 가담했지만, 그녀는 공화파를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카이사르 파를 지지했으나 돌라 벨라 장군에게 실질적인 지원은 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근위대 대장이던 레피두스와 서쪽 지방이 안토니우스와 제휴하자,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잃느니 적과 협약할 것을 택한다. 11월 23일, 렉스 티티 아가 맺어지고 5년 기한의 합의각서가 조인되면서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의 제2기 삼두정치 시대가 열렸다.
이때부터 수백 명의 기사와 원로원 의원을 죽인 '공고숙청' (재판 없이 처형하는 로마시대의 사형제도)이 대대적으로 단행되어 모든 적대자들이 죽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기사와 원로원 의원들이 학살되었는데, 그중에는 탄핵 문서에서 14개의 격렬한 문건으로 안토니우스를 비판한 키케로도 포함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손과 머리를 잘라 로스트 르 법정에 제시했으며, 그의 부인 풀비아는 머리핀으로 키케로의 혀를 찔렀다고 전해진다.
안토니우스, 동방원정을승리로이끌다
B.C. 42년 10월,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삼두 집정관 군대가 그리스의 필리피에서 공화파를 대파했다.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자결하고 주요 포로들은 시인 루카누스가 '로마 민중의 장작더미'라 부른 학살장에서 처형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곧 대규모 동방 원정길에 올랐다. 공화파들을 수용했던 지역에 삼두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군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산을 거두기 위함이었다. 이 원정은 이 기회에 옥타비아누스보다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안토니우스의 야심에도 부합했다.
그리스로 가는 도중 그는 과거 수사학을 배웠던 아테네에 잠시 들러 아테네인처럼 엘레우시스의 제전에 참가한다. 이오니아를 거쳐 에페수스에서는 플루트와 하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바쿠스 신의 여제관(디오니소스 행렬에 등장하는 여인들)'과 '사투로 이'와 '판의 호위를 받으며'새로운 디오니소스'라 칭송받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한편, 조공과 엄청난 세금을 부과해 거두었다.
그리고 점차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이집트로 접근했다. 그는 무지아와 비튜니아와 카파 도체를 가로질러 유대 땅에 이르러,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인 에돔 사람 헤로데와 그 형제 파사엘을 소왕(/J포)으로 임명해 유대 문제를 해결했다. 실리 시아에 닿은 그는 마침내 장정을 멈춘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서 그는 군대의 지지를받았고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카이사르의 종손으로서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목되었을 뿐 아니라 키케로를 포함 한상 당수 원로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를 상대하며 그는 뛰어난 상황 대처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의 눈은 번쩍번쩍 빛이 났으며 그는 자신의 눈에 신성한 권위가 담겨있음을 믿게 하려 했다. 그는 상대에게 눈길을 고정시켜 머리를 조아리게 하길 좋아했다. 고수에 토누 스는 말한다.
그녀는 여인의아름다움이 꽃을 피우고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안토니우스를 향해갔다. 플루타르크 타르수스에서 열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외교회담은 두 실력자 의회 담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회담에서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이집트의 운명이 그에게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힘과 용기와 덕성의 상징인 헤라클레스 가자 신의 조상이라고 천명했다. 그는 실레노스.마이나스,사티로스의 행렬 이경의를 표하는 디오니소스와 자신을 동화시키고자 했다. 프롤레마이오스 왕가 역시 헤로스와 신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말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보다 20세 이상 연상에 오랜 군사적, 정치적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가냘픈 18세의 조그만 청년 (키케로의 말) 옥타비아누스와 전혀 이탈리아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점차 권력을 장악해 갔으나 달랐다. 열정적이 고관 대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쾌락을 열망하는 선동가인 안토니우스는 도덕적 거리 낌 없이 동료들과 함께 자유분방한 축제를 즐겼다.
그는 솔직하고충직한 성품으로 병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신속한 판단과 즉각적인 행동을 요할 때 가장 뛰어난 힘을 발휘하는 그도 나중에는 되는 대로 놔두다가 때로 심각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이러한 불안정 성은아 마도 내키는 대로 여자를 고르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로마 교양인들이 대개 그렇듯 그리스 애호가 있으며 빼어난 운동선수 있을 뿐 아니라아시아직이라고 일 걸어질 만큼 뛰어요변가이기도 했다. 그는 미사이 구와 과장법 농원 하여 군중의 일정을 일께 우는 신동적인 연설을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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