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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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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 클레오파트라와 '디오니소스'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만나다. B.C. 41년, 안토니우스는 쿠드노스강 어귀인 타르수스에 청 박해,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군대가 카시우스를 지원한 이유를 듣겠다며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냈다. 하지만 그것 은평계에 불과했다. 이 영화로운 여왕과 재회하고자 한 그는 자신이 여왕의 군사적, 재정적 후견인이 될 수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새로운 실력자와 협약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모했는데, 당시 파르티아군대는 유대 땅 너머 로마 호민관이 통치하는 지역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는 로마의 오랜 적을 대파할 꿈에 부풀어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동방의 새로운 실력자와 협약을 맺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도도한 그녀는 몇 번의 압력적인편지가 온 후에야 몸을 움직였다. 아프로디테-아나디오메네가 디오니소스를 방문한다는 소문은 금방 퍼졌다. 

 

클레오파트라는 화려한 도착식을구상했다. 그 장면을 플루타르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금장식된 뱃머리, 진홍빛 돛, 은으로 된 노를 갖춘 배가갈피리와 키타라(고대 그리스의 악기로 기타의 원형) 장단에 맞춰 노를 젓는다. 그림 속의 아프로디테처럼 치장한 여왕은 금으로 장식된 별실에 누워 있다. 

 

그녀의 주위에는큐피드신을 닮은 아이들이 부채질을 하며 서 있다. 네 레이디스와 그라시아처럼 차려입은 아름다운 시녀들이 방향타와 밧줄을 잡고 있다. 수많은 향로가 뿜어내는 그윽한 향기가 강변을 뒤덮는다. 안토니우스가 선상 만찬에 클레오파트라를 초대하자, 그녀도 자신의 호화로운 배로 그를 초대했다. 수많은 횃불이 밝혀진 가운데 축제는 나홀이나 계속되었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여왕은 아름다움이 활짝 꽃피는 나이이자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있었고, 쾌락을 갈망하는 마흔두 살의 안토니우스의 영광은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들의 우호는 즉각이루어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가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 시노에를 처형하겠다고 약속했다. 경쟁자들이 제거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와 안토니우스를 기다렸다.

 

모방할 수 없는 삶

B.C. 41년 겨울,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 1년간 머 물미 훈련장과 토론장, 유적지와 성지를 둘러보았다. 로마의 의상 인토가 대신 그리스의 클라우스를 입은 그는 연일 축제와 페락 속에서 철저한 개인생활을 즐겼다. 클레오파트라는 검술 장클레 오파 트라는 \'메테 (도취)\'라 새긴 반지를 끼고 다녔으며, 밤이면 둘이서 평민 복장을 하고 거리로 나가 취객들과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연습장, 사냥터 등 안토니우스를 따라다니며 한시도 그의 결을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떠나지 않았다. 

 

귀금속으로 장식된 식기에 연일 진수성찬이차려지면서 자칭 '모방할 수 없는 삶(아미 메 토비온)'이라 명명한 생활을 하는 무리가 형성되었다. 환락, 자유, 영원한 행복에 취한 이런 생활은 엘리트 계층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했다. 함께 주사위를 하고, 숨을 마시고, 사냥을 했다. 그가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그와 함께했다.

 

어울리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이집트 여성처럼 로여성도 자유를 누립고간접적이지만 경치적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혼은 다른 가문과 동맹을 의미했다. 옥타비아를 안토니누결혼시킨 것도 마찬가지이다. 옥타비아는'우아함과 정숙함. 신중함이 미모와 조트이룬' 여자였다(플루타르크). 옥타비아누스는 BC리비아(아래)와 결혼 그가 전남편인 네로에게서 리비아를 빼앗을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는 끝까지 리비아를 존대했다.(수에토누스) 그가 사랑스러운 연인 이상임을 상기시켰다. 하루는 마레오 티스 호수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가 낚싯줄에 절인 청어를 달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전하, 저희는 저희 이런 이집트인에게 맡기소서.

낚시가 당신의 직책인 줄아십니까? 전하의 직책은 수많은 도시와 나라, 왕국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안토니우스는 B.C. 40년 겨울이 끝날 무렵 외부 상황을수습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의 곁을 떠났다. 파르티아 군대가 소아시아의 남부, 시리아, 유대 지방을 점령했으며, 헤로데왕은 로마로 피신했다. 안토니우스가 떠난 지 6개월 만에 클레오파트라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달), 알렉산더 헬리오스(태양)라는 쌍둥이를 낳게 된다.

 

안토니우스, 동방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아내 풀비아의 부추김으로시리아에서 그리스 쪽으로 공격을 가했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그녀의 반란이 실패했던 것이다. 격렬한 부부싸움 끝에 화가 난 안토니우스는 브린디시 항구를 점령하고 다시는 아내를 보지 않았으며, 아내는 얼마 후 죽었다. B.C. 40년 10월,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조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안토니우스의 동방경영 시대가 다시 열리고, 서방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프리카는 레피두스에게 할당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러한 권력 분할에 매우 불안해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남아 재혼한다면?출발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B.C. 38년 대승을 거둔 안토니우스는 동방 집정판으로서 베풀었는데, 연회는 대부분 아테네에서 강탈 한옥 타비 아누스는 조약을 확실히 하고자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와 몸이 허약했던 안토니우스를 결혼시켰다. B.C. 39년 여름, 이집트 점성가의 예언대로 둘 사이에는 첫 딸 안토니아 마요르가 태어났다.

 

안토니우스는 처남 옥타비아누스와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신성한 율리우스를 위한 새로운 종교의식을 제정하면서 그를 제관으로 임명했다. 마침내 이탈리아에 평화가 오는 듯했다. B.C. 39년, 삼두 집정관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이 자시 실리아를 관할하는 섹스투스와 미세노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로마는 이집트의 관문에해당하는 지역들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특히 클레오파트라의 적이요, 안토니우스의 오랜 측근인 헤로데를 원로원의 원로이자 유대, 에돔, 사마리아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집트의 여왕이 불안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운동을싫어했다. 반면 정기적으로 운동에 전념했던 안토니우스는 뛰어난 선수였다. 운동경기를 개최하여 스스로 심판으로 참여하길 좋아했던 그는 조직위원장의 자격으로 대회 경비를 지원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여왕
화려한 여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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