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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나라

어떻게 먹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노동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노동은 자연을 접하면서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움직이며 진행되는데, 노동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어떻게 먹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노동은 필연적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표현한다. 노동이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공상이 아니라면, 구체적인 생산수단을 이용해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정일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을 통해 생산물을 산출한다. 어떤 도구를 이용해 어떤 생산물을 산출하느냐의 문제는 노동의 한 측면이며, 이는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를 우리는 생산력이라고 한다. 노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협업과 분업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는 이 일을 하고, 누구는 저 일을 하면서 일들이 전부 모여 사회 성원들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노동은 사회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관계를표현할 수밖에 없다. 노동 과정에서 역할이 나뉘면 하는 일에 따라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노동의 대가에 대한 분배도 달라지므로, 노동에서의 인간관계를 우리는 생산관계라고 부른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노동의 양면으로, 노동의 변화에 따라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변할 수밖에 없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대 또는 농사를 짓던 시대에는 각각 그 시대에 어울리는 생산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시대에는 공장 노동에 어울리는 생산관계를 가진다. 이를 생산양식이라고 한다.

 

먹고사는 방식에 따라 문화가 결정된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살면서 그 방식에 따라 문화를 만들어 간다. 즉, 어업·농업·목축업을 중심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각각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맞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목축업을 중심으로 먹고사는 사람에게 개는 양이나 소를 몰고 여기저기 이동할 때 꼭 필요한 동물이다. 

 

양이나 소는 식용으로 길렀지만, 개는 식용으로 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개는 단순한동물이 아니라, 친구나 가족 같은 존재였다. 농업을 중심으로 먹고사는 사람에게 소는 밭이나 논을 갈 때 꼭 필요했다. 개는 식용으로 길렀지만, 소는 식용으로 기르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개가 가족 같은 존재였다면 농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소가 친구를 뛰어넘는 가족 같은 존재
였다. 이처럼 사람들이 먹고사는 방식에 따라 문화와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관습이 만들어졌고, 이런 것들이 점점 모여 법이 만들어지고 예술이 꽃피우게 된다. 

 

문화나 관습, 법과 예술은 구체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먹고사는 생활방식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원시 공 산세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까지의 역사 인간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인간의 삶은 동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물처럼 사냥을 하고, 열매도 따먹으면서 살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열심히 사냥하고 채집해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분배의 불평등은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하고, 그 죽음은 공동체의 약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약화는 공동체 성원 모두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공동체 속에서만 생존이 가능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평등했다. 모두 평등하게 열심히 일했고, 부족하지만 모두가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도록 나누어 먹었다.

 

먹고사는 방식은 변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채집과 사냥 과정을 거쳐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살게 되었고, 이를 통해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농경과 목축은 채집과 수렵을 하던 시대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조금이나마 미래를 위해 비축할 수 있는 음식물도 생기고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음식물을 어떻게 나누어 먹을지 결정하고, 미래를 위해 비축한 음식물을 관리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동체 지도자에게 권력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미래를 위해 비축한 음식물을 다른 공동체에게 빼앗기지 않기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음식물이 부족하면 다른 공동체의 남은 음식물을 빼앗기도 했다. 바로 공동체 간의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참혹했다. 패배는 미래를 위해 어렵게 모은 식량과 함께 사람도 전부 약탈당한다는 의미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노예로 끌려가사회의 가장 낮은 계급이 되었다. 노예제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노예제는 노예에 대한 전인격적인 착취를 통해 유지된다. 노예의 노동으로 사회의 모든 생산물이 만들어졌지만 노예는 자신이 생산한 모든 생산물을 노예주에게 착취당했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물만 허용될 뿐이었다. 

 

노예는 자신의 노동으로 노예주를 먹여 살렸고, 노예주는 노예의 노동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도 노예는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취급되었으며, 이런 사 고발 식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작성한 아프리카 보고서 중에는 경찰과 정착민이 사냥한 포유류 항목에 '여자 부시먼 400'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노예는 가축처럼 재산 증식의 도구로 사용되고,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노예는 대규모 농장에서 혹독하게 노동했으며, 노예주의 성노리개로 혹사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노예주들이 소비만 한 것은 아니다. 배부름과 향락에 빠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평생 그렇게 사는 것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노예주들은 결국 더 고차원적인 쾌락을 위해 예술과 철학같은 정신노동도 했다. 노예들의 육체노동에 의존해 정신노동을 담당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생산물과 육체까지 착취당하는 노예들은 열심히 일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혹독한 감시를 피해 적당히 일했다. 

 

그 결과생산은 조금씩 차질을 빚었고, 노예 확보를 위한 전쟁도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의 노예 수급이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예들의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노예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2.05.09 - [분류 전체보기]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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