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날 무렵 땅을 비옥하게 해주는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된다. 이때는 지중해 주변의 다른 강들이 마를 시기이다. 고대인들은 나일강이 이집트 땅에 가져다주는 풍요에 경탄했다.
박물관의 중심지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지적, 예술적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물론 기하학의 유클리드, 시인 테오크리토스와 칼리마코스, 조각가 아펠레스 등이 활동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던 B.C.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학파 시대에는 못 미치지만, B.C. 1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역시 당대 지식인에게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문화의 중심지는 왕족이 사는 거리에 있던 도서관과 박물관이었다. 두 건물은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자료 수집을 권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 건립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에 이 도서관은 70만 권에 달하는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페르가몬(소아시아 쪽에 있던 그리스 중심도시)에 있는 도서관과 더불어 건설하다는 믿을 받은 당대 최대 규모였다. 서기들은 소장 텍스트를 필사 교정하고 주석을 달았다. 과학과 철학은 이 시대에 큰 진보를 이루었다.
어원적으로 볼 때, 뮤즈(Muse, 그리스 신화에서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에게 전세계에서 출판된 모든 객을 거의 완벽하게 모두 볼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사하는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박물관 뮤제 이온(mution)은 지적, 예술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인 동시에 과학 탐구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곁에서 데메트리스는 B.C. 200년경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들을 모아 연구원을 만들었다.
연구원은 뮤즈의 보호를 받는 박물관에 자리를 박물관에는 왕의 지원 아래 토론과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대형 회의실과 갑았다. 처음에는 원형 건강이 있는 넓은 회랑, 거대한 식당 등이 갖춰져 학자들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연구원의 부속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서관을 호메로스 서사시의 첫 번째 편집자인 제노도 투스, 있었다. 또한 도서관에서 학자들 간의 교류가 소장 저서들의 목록을 활발히 이루어졌다. 분류와 목록 작성에 작성한 갈리마르 코스 지리학자인 중점을 둔 당시 학문은 때로는 고증학적 연구에 편중되긴 했지만, 학자들의 엄청난 에라토스테네스 같은 학자들이 관장했다.
작업 덕분에 수많은 고문서가 우리에게 클레오파트라 집권시에는 색인과 꼬리표가 부착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깨끗이에 정돈된 책들이 70만 권에 달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수사학, 철학, 의학, 해부학, 이 책들은 막대기에 기하학, 유체 정역학, 지리학, 천문학과 같은 수많은 고정되어 있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다. 군대 학문의 태동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과자 제조법을 찾아볼 지중해 연안의 또 다른 중심지인 로마 역시 이 이집트 당대의 모든 지식이 도시의 음성에 주목했다. 시인 카 톨부스 있었다. 왕성한 연구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 같은 시인들은 알렉산드리아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로마인들은 400 개의 귀금속으로 장식된 금과 무늬가 새겨진 온 쟁반 같은 보물을 몹시 좋아했다. 이것들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의 특산품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인들은 괴디하며 기본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선호하는 취향이 있었다. 지금씩 주변 전역에 넘쳐나던 자그마한 조각상들 역시 이러한 취향이 잘 반영되었다. 폼페이의 집에도 이집트 회화의 물이 많은 곳의 땅은 영향이 발견된다.
로마가 노리던 제물, 이집트
여타 지역보다 풍부한 산물을 제공한다. 그러나 자연환경이 척박할 경우 사람의 노동이 우세하게 된다. 스트라본 대정복 사업 중이던 로마는 점차 지중해 연안에 있는 거의 모든 라지드 왕조의 부는 나라들을 차지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 즉 '우리의 바다'라 불렀다. B.C. 1세기경 정복당하지 않은 이집트 지역은 로마인들에게는 동방의
대부분 농산물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조성되었다. 파라오나 환상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경제적 · 군사적 차원에서 중대한
목표가 되었다. 사제들의 토지는 그리스 지방관료들에게 양도되기도 했다. 토지는 사실 이집트는 그리스 국가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토착 이집트인이 라지드 왕국은 엄청난 부를 생산하여 그 대부분을 왕에게 귀속시켰다. 완전한 계획경제로 운영되는 경제는 대부분 경작했다. 그들을 짓누르던 소작료와 기타 부역은 산발적인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인(인구는 7백만 명으로 5위)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스타비아에서 발굴된 보석 찻잔(왼쪽)처럼 이집트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작품을 로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흑요석 몸체에 금줄을 대어 상감을 한 이 찻잔은 태양을 머리에 쓴
암소 하토르와 매로 상징되는 그 남편 호루스(태양신)에 대한 봉헌식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강력한 관료조직은 국가를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 놓았다. 아래는 타니스의 통치자 상이다. 피라미드 계급 서열의 맨 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제1장 관인 디오이 세투스가 있었는데, 이들은 왕의 금고와 창고에 들어오는 공물의 그리스의 전략에 따라 경작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주지사, 집정관, 대신 등이 경작을 감찰했으며, 이들은 모든 권력을 위임받아 각
행정단위를 통치했다. 이주한 그리스 군인들에게 배운 통치기술과 새로운 문명이 출현함으로써 보다 나은 경작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비옥한 파이움 지역은 강력한 그리스 식민통치자들이 경영했다.
모든 생산물은 국가가 지배했다. 기름, 맥주, 파피루스, 아마 같은 전매품들을 독점했으며 사적인 거래에는 엄중한 계약체계와 허가제를 실시했다. 왕립 작업장들은 엄격히 감시되었고 가격은 원가에 관계없이 매겨졌다. 라지드 왕국의 생산량은 많은 데 비해 소비량은 적어 나머지는 수출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창고에는 엄청난 양의 수출용 물품들이 쌓여 있었다. 그 모든 수입은 은행이 관리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이 국가가 경영하는 은행이었다. 이곳은 세금과 관세를 거두고 허가증을 관리하는 공공 은행이었다. 은행은 그 수입을 투자하고 대부하여 자산을 불려 나갔다. 라지드 왕국은 은행들이 자기 은행의 자산을 책임지게 하는 독창적인 체계를 고안해 냈다. 품질과 종류를 관할했다.
따라서 왕이 강력한 군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이들은 파라오의 효과적으로 마련했다. 민족주의자와 성직자 간의 대립으로 점차 침식되어 가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강력한 군대는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대변자들로 잦은 서신 왕래를 통해 서로 밀착된 관계를 유지했다.
오래 전부터 이집트의 황금에 눈독을 들이던 로마는 이집트 안팎으로 충돌이 있을 때마다 중재에 나섰고 때로는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집트 역시 아시아의 막강한 셀레우시데스 왕국에 대해 늘 로마를 내세워 세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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