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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13세

B.C,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 레 테스)는 자신의 장녀인 클레오파트라와 장남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한 뒤 죽음을 맞았다. 1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라지드 법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살이 갓 넘은 아이와 형식적인 결혼을 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통치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이리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 남부와 북부 전역을 통치하는 '두 땅의 여왕'이 된다.

 

18세의 여왕

두 가지 얼굴의 클레오파트라이다. 알렉산더 전우의 후예인 클레오파트라에게는 그리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집트 사원의 저부조에서는 파라오의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관례에 따라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는 '필로 파토르(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파라오의 어마어마한 권한을 두 손에 쥔 그녀는 '살아 있는 법'이 된 것이다. 명령, 영화. 가신과 토지를 보장받는 왕권의 신성함이 이집트의 사제들과 그리스의 성직자들이 올리는 종교의식으로 인준되었다.

 

지혜로운 여인

왕가의 규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클레오파트라는 조금 자라자 수세기 동안 파라오의 딸들에게 행해져 온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형제이자 남편인 왕 곁에서 나라를 통치하게 되어 있는 딸들이 받는 교육은 남자들이 받는 교육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교육과정은 매우 다양했다. 파라오는 전통적으로 교육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해 왔는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 전통을 이어받아 교육을 더욱 강조했다. 모든 그리스 계통의 왕조들이 그랬듯 이들도 '엔 쿠클 레이오스
파이데이아(enkukleios paideia, 백과사전이라는 뜻을 지닌 encyclopedia의 어원이 되는 말)', 즉 폭넓은 지식과 일반
교양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이집트 전역에 걸쳐 초중등 교육기관은 물론, 토착 이집트인을 “철학자들과 하는
토론, 시인들과 함께하는 연극, 합창과 춤과 공연, 향연의 테이블에서는 조리 있는 대화· 악시오코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보다 뛰어난 음악가들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아테나이오스 통치할 그리스인 엘리트 양성을 위한 왕립학교의 설립이 장려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에는 교과과정 중 문예 과목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래서 독서는 필수였으며, 그리스 문학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삼았다. 도서관에는 그리스 문학의 걸작들이 소장되었고, 필수 작품'의 목록이 세심하게 짜여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궁정에서 높이 평가되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비롯하여 헤시오도스와 핀다로스의 작품, 당시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보다 더 사랑을 받던 유리피데스의 비극, 메난드로스의 희극,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들을 읽고 공부했다. 그리고 데모스테네스의 대화집으로 수사학을 배웠다. 과학 교육 역시 중시되어 대수와 기하,
천문학과 의학 수업을 받았다. 예술 분야에도 특별한 소질이 있던 그녀는 그림 그리는 법, 7현리라 연주법, 노래하는 법
등을 배웠으며 '야만적인 나라를 통치하는 데 그리스 문화의 '필수'로 여겨졌던 체육과목에도 열중했는데, 특히 말타기를 아주 잘했다.


헬레니즘 연대에 나온 이집트의 파피루스, 서판, 패각(조개껍데기에 새긴 것) 등은 당시 이집트의 풍부한 학구적
풍토와 알렉산더 정복 이래 유지되어 온 교육 전통의 동질성을 잘 보여 준다. 매우 완벽했던 교육은 그리스 엘리트
지배자들을 고려하여 유지되었으며 지성과 육체의 균형 있는 발전과 더불어 개인의 인격 형성을 목표로 두었다.

 

문학, 수사학, 의학과 천문학 등이 가장 활발히 연구되던 학문이었다. 또한 음악이나 수학 역시 활발히 연구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지적인 자질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녀의 외국어에 대한 소질은 천부적이었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점을 조금 과장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녀의 혀는 마치 각기 다른 음을 내는 여러 개의 악기와도 같다. 그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여러 나라 말을 구사했다. 구사 능력은 통역사의 도움이 거의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에티오피아어, 아랍어, 헤브루어, 시리아어, 메디 아어, 파르티아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녀는 이 모든 언어를 습득했던 것이다.” 왕가에서 이토록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클레오파트라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처럼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를 바탕으로 외교적인 흥정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또한 학문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대수, 기하학 전문가인 포틴이 자신의 G저서에 '클레오파트라 법전'이라 이름붙이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클레오파트라는 어려서부터 의사 디오스코리데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달력을 만든 천문학자 소시게네스 같은 당대의 석학들을 존경하고 따랐다. 클레오파트라는 때로 무례에 가까운 유머도 스스럼없이 했다. 그렇지만 지적이고 사색적인 그녀가 던지는 농담에는 재치가 넘쳤고 깊이가 있었다. 농담을 좋아하는 그녀의 쾌활한 성격 저변에는 강력한 의지와
왕성한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그리스 작가들을 작품을 읽고 베끼고 요약했다. 특히 알렉산더가 어디를 가든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고
전해지는 《일리아드)를 비롯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중시했다. 그들은 필로크테투스, 아킬레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니 등의 역사서를 읽고 작문 연습을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화장술에 대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알렉산드리아 여인은 향수뿐 아니라 향유와 눈화장용 분도
애용했다. 아래는 향수를 만드는 장면을 보여 준다.

 

이집트인 벽화이미지
클레오파트라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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