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80년, 로마의 집정관인 술라는 이집트의 여왕 페레 니케와 그녀의 사촌 프톨레마이오스 11세의 강제 결혼을 위해 외교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결합이었다. 몇 달 후, 왕이 여왕을 죽이자마자 그 자신도 암살된 것이다. 다시 왕위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서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돌아갔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네오스 디오니소스(새로운 디오니소스)' 필로 파토르(아버지를 사랑하는 자)' '필로 메토르(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지만, 백성들은 그를 '아울 레 테스(플루트부는 사람)'라고 불렀다.
플루트를 부는 파라오?
이렇듯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는 축제와 연회를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술에 취해 무희들 사이에서 악기를 연주하곤 했다. 반면 당시 나라를 분열시키던 난제들에는 무관심했다. 토지 소유를 둘러싼 폭동 및 원주민 반란, 경제문제, 재정 고갈 등이 잇따랐으나 그는 방탕만을 일삼았다. 게다가 그는 라지드 왕조의 번영을 짐작케 하는 넙적한 접시모양의
잔이다. B.C. 2세기경에 만들어진 이 잔은 이집트와 그리스 예술의 만남을 잘 보여 준다. 오시리스의 스핑크스와 가슴이 작은 이시스-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적인 요소이고 풍요의 뿔을 들고 있는 노인인 나일과 어린 후계자 호루스 트립톨레모스, 그리고 그리스 미의 여신을 연상시키는 계절들은 왕위를 뺏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집트를 로마에 넘긴다고 알렉산드리아적인 한 프톨레마이오스 11세의 요소이다. 유언장을 내세워 로마인들이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은 이 유언장을 이용해 죽은 파라오의 개인 재산을 탈취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자율성에는 여전히 호의적이었다.
B.C. 65~64년 원로원은 귀족을 등에 업고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려는 계획을 연달아 부결시킨다. 원로원은 이집트가 로마에 속하면 카이사르나 크라수스가 엄청난 재정적, 정치적 이득을 얻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집트 문턱에 이른폼페이우스 대장군 이집트의 독립을 적극 옹호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폼페이우스 대장군이다. 폼페이우스는 마리우 스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우두머리인 세르토리우스를 패퇴시켰으며, 당시 지중해에 발호하던 실리시아 해적들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의 막강한 왕 미트리다 테스를 굴복시켜 세인의 숭앙을 온갖 방탕한 짓을 다 하던 아울 레 테스는 플루트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에 어찌나 자부심을 가졌던지 궁전에서 음악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참석자들 틈에서 순위를 가지고 싸우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스트라본 일부 알렉산드리아 인들에 둘러싸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통치 시절, 이집트는 빚을 지고 국력이 심하게 약해졌다. 받고 있었다. B.C. 64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굴복시킨 그는 이듬해 시리아를 로마에 복속시켜 중동과 이집트를 향한 로마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어 예루살렘 역시 정복했다.
아울레테스는 동방원정 때에 8,000명의 기병과 금관 등 상당한 선물을 폼페이우스에게 선사하고 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B.C. 60년 폼페이우스는 그 이듬해에 집정관이 될 카이사르와 연합한다. 아울 레 테스는 8,000 탤런트라는 엄청난 돈을 로마에 바치고 자신의 권력에 대해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다. 로마는 율리우스 법에 따라 아울 레 테스를 가신의 지위에 놓아, 겉으로는 '로마인의 동맹이자 친구'라 천명했다. 그럼에도 위험은 다가오고 있었다. B.C. 58년, 아울 레 테스의 형제가 지배하고 있던 키프로스 섬은 로마의 공격을 받았고, 아울 레 테스는 독살되었다. 그리하여 정복자 카토는 키프로스 섬과 함께 왕이 남긴 재산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아울레테스
이러한 군사적 동향이 알렉산드리아인들을 위협했을까? 아울 레 테스는 이집트를 떠나 로마로 피신한다. 아마도 아울 레 테스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B.C. 57년부터 그는 로마의 '힘 있는 시민'이라는 허울 좋은 명예를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B.C. 1세기경 동방 로마의 실력자였다. 그는 동방 제국에서 잇따른 승리를 거두고 이 지역에 굳건한
조직을 마련하였다. 이집트 땅을 침범하라는 명을 받은 사령관 가비니우스는 폼페이우스의 친구였다.
로마와 그 통치자들의 힘은 로마 군단의 병사에 기초한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직업 군인인 이들은 모든 종류의 고역에 익숙해 있었고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그들의 지휘관인 총사령관의 전적인 지배하에 혹독한 규율에 복종해야 했다. 총사령관은 이들에게 임페리움(생사여탈권을 행사했다. B.C. 2세기 달부터 상비군으로 운영된 이들은 출신 지역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 제1의 군대였다.
로마 시민 출신은 물론 갈리아, 누미디아, 스페인, 독일, 트라키아 출신의 용병들도 섞여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요직을
점하고 있던 라지드의 군대는 로마 군단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얻기 위해 로마의 유명한 재정가인 라비리우스에게 빚까지 겨 가며 금품을 뿌리고 원로원 의원직을 샀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울 레 테스의 장녀 페레 니케
4세에게 왕위가 넘겨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로마 원로원에 사신을 보내 부녀간의 충돌을 중재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게 했다. 아울레테스가 보낸 사신의 상당수가 살해되자, 로마는 망설였다.
로마가 군사적으로 개입해 줄 것에 기대를 걸었던 아울 레 테스는 신탁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자 절망에 빠져
소아시아의 에페수스로 피신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는 클레오파트라의 의붓자매가 통치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나이 열 살 무렵의 일이다.
로마, 무기를 들다
이 무렵 로마는 알렉산드리아에 군사를 개입시키기로 결정한다.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부관인
가비 니우스의 군대가 이집트로 진군했다. 아울 레 테스가 원정에 건 상금 1만 탤런트의 힘이 분명 컸다. 24세의 혈기 넘치는 장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대를 이끌었고, 가비 니우스는 펠루시움(현재의 텔 파라마)에 이어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다. 페레 니케의 남편 아르 킬 라우스가 전사하자 아울 레 테스는 다시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해 당장 딸을 처형했다.
가비 니우스는 떠났으나, 로마인들은 주로 게르만과 골족으로 구성된 용병대를 알렉산드리아에 남겨 두어 경제 하도록 했다. 아울 레 테스의 채권자이기도 한 로마인 라비리우스가 이집트의 새 실력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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