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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의 죽음

B.C. 48년 9월 28일, 그리스의 파르 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대에 대패한 폼페이우스가 뜻밖에 알렉산드리아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의 문턱에 도착했을 때 도착한 것이다. 있어야만 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 죽은자는 말이 없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령에 따라 암살당했다.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피신할 곳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배신당한 것이다. 이제 동방에는 카이사르의 적수가 없었다. 패배한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40일이나 지중해를 표류하다가 아울 레 테스의 자녀들에게 안식처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은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섭정관들을 잘못 판단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포틴과 테오도투스는 손익
계산을 면밀히 한 후에 폼페이우스를 죽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후환을 면하고 카이사르 또한 그들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고 테오도투스는 확언했다. 3일 후인 10월 2일 카이사르가 2개 카이사르는 여러 여왕을 정부로 삼았다. 그중에는 모리타니의 여왕도 있다. 하지만 그가 가장 큰 정념을 품은 대상은 역시 클레오파트라였다. 학문에 정통하고 예술 애호가였으며 위대한 장군이었던 그는 당시 54세로 여자를 잘 유혹하기로도 유명했다.

 

젊은 여왕과 그의 만남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정념을 넘어서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졌다. 카이사르도 강대한 나라의 여왕과 동맹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클레오파트라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그가 필요했다.하지만 장 레옹 제롬의 그림을 보면,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 카이사르가 여왕에 완전히 압도된 모습이다.

 

군단(120명)과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펠루시움 앞에 당도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운명을 모르는 채 배 위에서 신중히 대기하고 있었다. 테오도투스가 배 위로 올라가 폼페이우스의 머리와 반지를 카이사르에게 헌사하자 그는 그 비통한 증거물 앞에서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이 자신에게 보인 태도를 보고 마음을 놓은 카이사르는 호위병을 앞세우고 공식적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손에 달려 있었다.

 

누더기 속의 여왕

카이사르가 정복자로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자 군중들이 들고일어나서 수많은 로마 병사가 난투극 끝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로마인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군중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로마를 대표하는 집정관임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아울 레 테스의 왕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그 형제들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려 했다. 포틴은 당장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알렉산드리아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는 아킬라스의 지휘 아래 펠루시움에 주둔해 있는 이집트 군대가 다치지 않도록 철저히 신경을 썼다.

 

반면 보다 의심이 많은 클레오파트라는 몇 명의 밀사를 카이사르에게 보내 자신의 호의를 전할 뿐이었다. 나중에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입성을 받아들이는데, 입성은 '누더기(몇몇은 융단이라고도 전한다)에 둘러싸여' 한밤중에 몰래 이루어졌다. 그녀가 자기 형제의 첩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은밀하게 처소에 당도한 젊은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본 카이사르는 큰 매력을 느꼈다. 아침이 밝자,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카이사르의 옆에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것을 보고는 왕관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서 배신을 당했다고 외치며 궁을 뛰쳐나왔다. 카이사르는 소요사태 직전에 가까스로 그들을 진정시킨 뒤, 군중을 소집하여 아울 레 테스의 유언장을 낭독하면서 자신이 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내내 볼모로 잡혀 있었고 카이사르를 독살하려던 포틴이 처형된 반면. 아르 시노에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녀는 양부인 환관 가니메데스와 이집트군 진지에 합류했다. 아킬라스가 전사하자 가니메데스가 군대를 지휘했다. 함단을 조직하는 데 성공한 이집트군은 파로스섬을 점령하여 왕궁을 포위한 채 압박작전을 펼쳤다.

 

치열한 전투 끝에 카이사르는 파로스섬을 탈취한다. 그러나 병사들이 파로스섬과 유지를 잇는 방파제를 쌓고 있을 때, 엄청난 야기되었다. 난투극이 벌어졌으며 로마 병사들 사이에 공포가 피지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피신했으나 공격자가 실행자임을 자처했다. 또한 그는 이집트에 호의를 베푸는 것과 카이사르는 조그만 배에 함께 왕가의 분쟁을 중재할 것을 확인했으며, 훗날 몰려들자 배가 침몰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헤엄쳐 다른 배로 피신하여 아르 시노에 와 프톨레마이오스가 통치할 키프로스 섬을 죽음을 면했다.

 

이러한 이집트에 할양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마침내 왕가 형제의 단합을 축원하는 대연회가 벌어졌다. 전과에 고무된
알렉산드리아인들은 당시 세 사람의 생활은 기묘했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석방을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며 철학 강의와 과학 토론회 개최, 도심의 방문, 그리고 그래 봐야 적에게 손해나 될 것이라 여겨 기꺼이
그를 풀어 주었다. 그의 클레오파트라와 사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예측은 정확했다. 가니메데스가 쫓겨나고 클레오파트라는 연인 전술에 무지한 프톨레마이오스가 사령관이 되면서 알렉산드리 아군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다시금 왕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왕이라기보다는 볼모로서 그들 주변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해전에서 패퇴하였다. B.C. 47년 3월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왕의 원군으로 증강된 군대의 우두머리인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진영으로 전진했다. 개선장군의 승리였다.

 

불타는 알렉산드리아

카이사르는 물론 고대 그러나 이 젊은 파라오는 아르시노에와 포틴과  함께 누이와 로마인을 없앨 문필가들이 도서관 방화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가 그에게 이로울 것은 없다. 도서관은 안토니우스가 은밀한 계략을 꾸몄다. 유언비어를 마구 퍼뜨려 알렉산드리아 시민의 분노를 부추겼다.

 

페르가몬에서 가져온 20만 권의 책을 기부하여 드디어 B.C. 48년 10월, 펠루시움에 주둔하고 있던 부분적으로 재 축조되었으나, 4세기 아킬라스는 명령을 받고 2만 명의 보병과 2,000명의 이후로는 기병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했다.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협상을 거부한 그들은 카이사르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볼모로 잡고 왕궁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자, 나머지 시 전체를 점령한 채 그랜드항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곳에는 이집트 군함 72척과 로마 갤리선 50척이 정박해 있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에게 함락되지 않도록 배에 불을 질렀다. 대화재로 둑이 무너지고, 건물, 곡식창고는 물론 대도서관까지 다 타고 말았다. 혈전이 이어졌다. 시가전이 벌어졌고,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해 건물들을 부수었다. 탑이 무너져 내렸다.

 

전투는 바다로 이어졌고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다. 수개월의 전투 끝에 카이사르는 이집트 군대를 궤멸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무능력과 때마침 도착한 원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나일강으로 내몰린 이집트 군대는 떼죽음을 당했고 그중에는 B.C. 47년 봄,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는 무려 4척에 달하는 배를 이끌고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일화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묘사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사랑의 도피여행이기도 했겠지만, 승리의 여왕이자 강력한 로마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새 여왕을 나라 전체에 소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여행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게 찾아온 진실된 사랑과 함께, 나는 오랫동안 잊혀져 온 나일강의 기원과 알려지지 않은 원천을 알고 싶다. 루카누스
카이사르에게 이 여행은 클레오파트라의 승리 탐사여행이기도 했다. 22살의 미망인인 캄부 세스와 알렉산더의 탐사가 허사로 돌아가자 그는 19세기에 와서야 정체가 밝혀진 나일강의 신비스러운 원천에 호기심을 가졌다.

 

루카누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이 문제를 놓고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과 밤새 토론하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프톨레마이스도 있었다. 수렁에 처박혀 시신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황금 갑옷으로 그의 신원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갑옷을 자랑스럽게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왔다. 백성들은 상복을 입고 통곡했다.

 

B.C. 47년 3월 27일, 마침내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 이집트의 실권자가 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둘째 남동생과 재혼을 했다.

 

명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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