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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승리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된 새 파라오는 겨우 10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으므로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었다. 그녀의 여동생 아르 시노에는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 카이사르는 3개 군단의 로마 병사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 여왕을 보호하게 하고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또 전쟁 중에 자신을 지지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들에게
시가지의 오른쪽 구역을 할당해 주었다.

 

승리를 거둔 클레오파트라의 군대

승리한 로마의 집정관 카이사르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나일강을 따라 호화롭고 긴 유람을 떠났다. 사랑의 도피여행이었을까. 아니면 나라를 정탐하고 지방 실력자들을 접견하려는 정치적 여행이었을까? 클레오파트라는 5월에 임신을 했고 카이사르도 마침내 동방원정을 위해 떠났다. 그는 원정중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카이 사트는 자신과 클래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허락했다. 몇몇 그리스 작가들은 이 아들의 외모와 태도가 카이사르를 닮았다고 적고 있다.

 

카이사르의 아들?

B.C. 47년 6월 23일, 클레오파트라는 첫 아이를 낳았다. 사내아이였고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였다. 알렉산드리아 시민은 그를 '케사리온'이라 불렀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아이에게 그러한 이름을 남기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수에토누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떠난 얼마 후에 태어난 아이는 정말 그의 아이일까? 고대부터 이 사실은 의문시되어 왔다. 특히 로마인들은 그가 여왕의 사생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프톨레마이오스 케사 리온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덴데라와 에르만트의 사원 저부조에 자신과 함께 아이의 모습을 새기도록 했다.

 

이집트 사재들이 그를 적자로 인정해 주기를 잉태되었다고 확언했다. 아이는 적자로 인정되었고 이집트적인 완했다 그는 가신을 자신을 이시스- 아프로디테로 그리고 두 팔에 호루스-에로스를 안고 있는 금화를 주조하게 했다.

 

또한 테베 근처 에르만트에 있는 사원의 벽에는 클레오파트라가 아몬 옆에 등장하고 신들이 신성한 아이의 탄생을 주관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도록 했다. 이어 사제들은 아몬-라신이 카이사르의 형상으로 살아나 케사 리온이 전통 역시 존중되었다.

 

로마에 도착한 여왕

왕권을 확립한 클레오파트라는 B.C. 45년 여름, 로마에서 카이사르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아이와 허수아비 남편을 데리고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참석한 듯하다. 관중 앞에서 풍명이의 보호를 받으며 탄생하는 정면이 새겨져 있다. 신들 중애는 클레오파트라도 있다.

 

행렬이 펼쳐졌는데, 그중에는 포틴과 아킬라스의 초상, 나일강, 덴데라에는 파로스섬의 동상, 사슬에 묶인 아르시노에도 있었다. 밤이 되자 케사 리온이 이시스- 카이사르는 횃불을 밝히고 40마리의 코끼리를 앞세워 카피톨리움 언덕을 내려왔다. 병사들은 늘 그렇듯 지휘자에게 야유를 퍼붓고 그의 연인과 아이를 조롱했다. 로마 시민의 비난을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외칠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카이사르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로마인들 사이에는 음탕한 동방 왕족의 위험성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봉헌물을 바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호루스(하르포크라테스) 를 안고 있는 이시스의 상은 클레오파트라- 케사 리온의 짝을연상시킨다.

상징하는 이 '이집트 여인'에 대한 불평이 급속히 일고 있었다. 그는 B.C. 49년, 존경할 만한 로마 여인인 칼푸르니아와 결혼한 몸이 아닌가. 키케로는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처음에는 연구서를 빌린다는 구실로 아침꾼 무리에 끼여 여왕에게 찬사를 보내려 했으나, 여왕의 무례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뒤로 그는 사사로운 편지에서 끊임없이
클레오파트라를 비난했다.

 

모든 악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온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그녀를 티베르강 건너편에 있는 호화 정원이 딸린 별장에 묵게 했다. 더욱이 카이사르는 비너스-제니 트릭스 사원 안에 클레오파트라-비너스 황금상을 세워 여왕에게 공식적인 찬사를 보냈다. 비너스는 로마 민중의 수호여신일 뿐 아니라 카이사르의 집안인 이울리이가의 조상으로 천명된 신이기도 하다.

 

결국 신성화된 동방의 여왕과 로마의 여신을 결합한 셈이었다. 그는 그리스식의 왕국을 꿈꾸었던 것일까?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회의가 한참 열리고 있는 도중에 공화파의 반역자들에게 살해당한다. 그중에는 카이사르의 아들
격인 브루투스도 있었다. 마치 사냥꾼에게 쫓겨 궁지에 몰린짐승처럼 그들의 손 아래 발버둥 치던 카이사르는 그를 보면서 나의 아들. 너마저도!' 하고 외치면서 몸부림을 그쳤다. 사람들은 그가 23번이나 찔렸다고 전한다.

 

B.C. 44년 3월 보름, 다시 혼자가되다 카이사르의 권력은 날로 더해 갔다. B.C. 46% 는 10년 임기의 독재 집정관, 3년 임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B.C. 44년에 원로원은 그를 종신 독재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그가 왕이 되길 원한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B.C. 44년 2월 14일의 목신제 때 그는 안토니우스가 바친 왕관을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거절했다.

 

그럼에도 반대파들의 암살 음모를 막을 수는 없었다. B.C. 44년 3월 보름, 쿠리아 원로원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반역자들은 카이사르를 폼페이우스 상 밑에서 암살했다.

 

자신의 동맹자를 잃은 클레오파트라는 서둘러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알렉산드리아트 나는 여왕을 중오합니다. ·여왕의 거만함을요. 그녀가 티베르강 너머 정원에 있을 때면, 그 거만함이란 고통 없이는 더 올릴 수조차 향했다. 키케로는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왕이 도망가니 과히 기분 나쁘지는 않소.라고 썼다. 이십트뿐 힘오했다. 그러나 반역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수에토누스에 따르면 대담성이 결여된 그의 성품과 나이 때문에 반역파들은 그를 배제했다.고한다.

 

여왕의 그림
여왕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