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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나라

클레오 파트라의 대외정책 B.C. 35~34년 겨울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아르메니아의 왕과 맺은 동맹을 시작으로 활발한 외교를 펼친다. 동맹은 왕의 딸과 알렉산더 헬리오스 의약 혼으로 인준되었다. 또한 그녀는 유대 지방의 분쟁을 틈타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클레오파트라의 대외정책 유대지방에서 헤로데의계모 알렉산드라의 사주를 받은 아스모 니아인들이 헤로데와 충돌하자, 그녀는 알렉산드라를 지원해 헤로데를 위협했다. 또 파르티아에 대항해 메디아의 왕과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 계획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원조 거부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시리아를 정복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눈물 대단한 야심가인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와 레피두스를무찌르고 시실리아와 아프리카를 손에 넣어안토니우스의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클레오파트.. 더보기
불안정한 결합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아테네에서 B.C. 39년 가을부터 B.C. 37년 봄까지 머문다. 안토니우스는 체육대회의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심판을 보기도 하면서 즐겁게 생활했다. 그곳에서도 안토니우스는 '새로운 디오니소스로 칭송받았으며, B.C. 38~39년 겨울에는 아테네의 여신인 아테나 폴리아스에게 바치는 제전에 참여했다. 불안정한 결합 또한 그는 아테네인에게 연회를 조공으로 치러졌다. 그동안 파르티아 군대와 치른 싸움에서 두 차례 리비아와 결혼한 옥타비아누스로 인해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었다. 옥타비아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전쟁을 모면한 세 집정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B.C. 37년 여름 타란토에 모여 삼두 집정 시대를 5년 더 연장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 더보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아프로디테' 클레오파트라와 '디오니소스'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만나다. B.C. 41년, 안토니우스는 쿠드노스강 어귀인 타르수스에 청 박해,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군대가 카시우스를 지원한 이유를 듣겠다며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냈다. 하지만 그것 은평계에 불과했다. 이 영화로운 여왕과 재회하고자 한 그는 자신이 여왕의 군사적, 재정적 후견인이 될 수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새로운 실력자와 협약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모했는데, 당시 파르티아군대는 유대 땅 너머 로마 호민관이 통치하는 지역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는 로마의 오랜 적을 대파할 꿈에 부풀어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동방의 새로운 실력자와 협약을 맺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도도한 그녀는 몇 번의 압력적인편지가 온 후에야 몸을 움직.. 더보기
동방의 군주 로마에서 귀환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많은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 시노에의 사주를 받은 찬탈자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행세를 하여 혼란을 야기시키는가 하면, B.C. 42년과 41년에는 나일강의 물이 말라 기근과 페스트가 번졌다. 그러나 여왕은 무엇보다도 국제 정세에 신경을 써야 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충돌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펼치는 이집트 정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고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는 어머니 곁에서 파라오로 등극했다. 그리하여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이 유일무이한 통치자가 되었다. 분열된 로마, 그리고클레오파트라의 현명함,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더보기
클레오파트라의 승리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된 새 파라오는 겨우 10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으므로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었다. 그녀의 여동생 아르 시노에는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 카이사르는 3개 군단의 로마 병사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 여왕을 보호하게 하고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또 전쟁 중에 자신을 지지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들에게 시가지의 오른쪽 구역을 할당해 주었다. 승리를 거둔 클레오파트라의 군대 승리한 로마의 집정관 카이사르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나일강을 따라 호화롭고 긴 유람을 떠났다. 사랑의 도피여행이었을까. 아니면 나라를 정탐하고 지방 실력자들을 접견하려는 정치적 여행이었을까? 클레오파트라는 5월에 임신을 했고 카이사르도 마침내 동방원정을 위해 떠났다. 그는 원정중 왔노라.. 더보기
폼페이우스의 죽음 B.C. 48년 9월 28일, 그리스의 파르 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대에 대패한 폼페이우스가 뜻밖에 알렉산드리아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의 문턱에 도착했을 때 도착한 것이다. 있어야만 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 죽은자는 말이 없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령에 따라 암살당했다.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피신할 곳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배신당한 것이다. 이제 동방에는 카이사르의 적수가 없었다. 패배한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40일이나 지중해를 표류하다가 아울 레 테스의 자녀들에게 안식처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은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섭정관들을 잘못 판단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포틴과 테오도투스는 손익 계산을 면밀히 한 후에 폼페이우스를 죽이기로 결.. 더보기
천체순환도의 일부. 천문학과 점성술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클레오파트라는 단지 아름답기만 했을까? 디온 카시우스는 그녀의 적인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찬미하는 글을 쓰는 데 골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를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절세미인으로, 저항할 수 없는 마법을 지닌 여인으로 노래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미친 영향 그녀의 외모와 목소리 모두가 너무나 세련되고 매력적이어서, 이 세상에서 사랑을 거부하는 어떤자의 마음도 정복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나이 들어 목적이 된 사람의 마음까지도. 반면 플루타르크는 좀 더 신중하다. 그녀의 미모 자체가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며, 타고난 미모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정도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그 말이 확실한 듯하다. 그렇지만 클레오파트.. 더보기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13세 B.C,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 레 테스)는 자신의 장녀인 클레오파트라와 장남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한 뒤 죽음을 맞았다. 1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라지드 법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살이 갓 넘은 아이와 형식적인 결혼을 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통치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이리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 남부와 북부 전역을 통치하는 '두 땅의 여왕'이 된다. 18세의 여왕 두 가지 얼굴의 클레오파트라이다. 알렉산더 전우의 후예인 클레오파트라에게는 그리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집트 사원의 저부조에서는 파라오의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관례에 따라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는 '필로 파토르(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라는 칭호가 부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