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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거인들의 대결 옥타비아누스는 보병 7만 명과 기병 1만 2,000 명을 이끌었고, 함대 400척은 명장 아그리가 지휘했다. 외관상으로는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현저히 우세했다. 악티움, 거인들의 대결 병사가 7만 5,000명에보충대가 2만 5,000명, 기병대가 1만 2,000명 합류했고, 군함 500척 중 200척은 이집트 소속이었으며 화물선이 300척 뒤따랐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진홍빛 돛을 단 사령 관용 배 '안토니아'호에 올라 60척의 배로 이루어진 개인 함단을 지휘했다. 두 군대는 에페이로스 남쪽 암브 라키 아만에서 마주쳤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모두악티움곶에 진을 치고 겨울을 났다. 이듬해 봄, 첫 교전으로 아그리파가 주변 섬을 모두 점령하자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군수품 보급이 끊겼다. 군대가.. 더보기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충돌과 균열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군사적 충돌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함법성을 유지하면서 원로원이 자신의 동방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원했다. B.C. 33년 말, 그는 자신의악타 (보고서:역주)를 로마에 보넨다. 그리고 B.C. 32년 2월,안토니우스파 집정관들인소시우스와 아에노바르부스가원로들 앞에서 격앙된 어조로 그보고서를 읽자, 옥타비아누스가격렬하게 맞대응했다. 균열 며칠 후, 회의 도중 그는'알렉산드리아 할양을고발했다. 로마인들의적대감이 커지자안토니우스파는 이탈리아를떠나 에페수스로 가서안토니우스와 합류했다.마침내 나라는 완전히분열되었다.로마의 이익에 반하여안토니우스를 계속 따를것인가? 옥타비아누스를따라 그의 적과 '이집트여인'을 공격할 것인가? 원로들이 갈등하는 동안동방에서 클레오파트라와안토니우스는 에페.. 더보기
알렉산드리아 할양 며칠 후 알렉산드리아 시민은 전승식에 참석하기 위해 큰 경기장으로 모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은 단상 위에 놓인 황금 왕좌에 앉아 집회를 총괄했다. 일세 살짜리 왕 케사 리온은 그보다 낮은 자리에 안토니우스 부부의 세 아이와 함께 앉았다. 알렉산드리아 할양 이제 일급 살이 된 쌍퉁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알렉산더 헬리오스는 메디아의 왕처럼 수놓아진 드레스와 행진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는 군중을 모아 놓고 공작 깃으로 장식된 높은 삼중 왕관을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동방의 영토를 상당 부분 나누어 준다고 선언했다. 자식들에게 이집트와썼으며, 두 살짜리 프톨레마이오스 필라 델프는 마케도니아의 왕처럼 진홍색 클라우스와 챙 없는 모자, 조그만 장화로 치장했다.안토니우스가 담화에서 이집트 의.. 더보기
클레오 파트라의 대외정책 B.C. 35~34년 겨울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아르메니아의 왕과 맺은 동맹을 시작으로 활발한 외교를 펼친다. 동맹은 왕의 딸과 알렉산더 헬리오스 의약 혼으로 인준되었다. 또한 그녀는 유대 지방의 분쟁을 틈타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클레오파트라의 대외정책 유대지방에서 헤로데의계모 알렉산드라의 사주를 받은 아스모 니아인들이 헤로데와 충돌하자, 그녀는 알렉산드라를 지원해 헤로데를 위협했다. 또 파르티아에 대항해 메디아의 왕과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 계획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원조 거부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시리아를 정복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눈물 대단한 야심가인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와 레피두스를무찌르고 시실리아와 아프리카를 손에 넣어안토니우스의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클레오파트.. 더보기
불안정한 결합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아테네에서 B.C. 39년 가을부터 B.C. 37년 봄까지 머문다. 안토니우스는 체육대회의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심판을 보기도 하면서 즐겁게 생활했다. 그곳에서도 안토니우스는 '새로운 디오니소스로 칭송받았으며, B.C. 38~39년 겨울에는 아테네의 여신인 아테나 폴리아스에게 바치는 제전에 참여했다. 불안정한 결합 또한 그는 아테네인에게 연회를 조공으로 치러졌다. 그동안 파르티아 군대와 치른 싸움에서 두 차례 리비아와 결혼한 옥타비아누스로 인해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었다. 옥타비아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전쟁을 모면한 세 집정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B.C. 37년 여름 타란토에 모여 삼두 집정 시대를 5년 더 연장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 더보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아프로디테' 클레오파트라와 '디오니소스' 안토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만나다. B.C. 41년, 안토니우스는 쿠드노스강 어귀인 타르수스에 청 박해, 알렉산드리아의 로마 군대가 카시우스를 지원한 이유를 듣겠다며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냈다. 하지만 그것 은평계에 불과했다. 이 영화로운 여왕과 재회하고자 한 그는 자신이 여왕의 군사적, 재정적 후견인이 될 수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새로운 실력자와 협약 그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모했는데, 당시 파르티아군대는 유대 땅 너머 로마 호민관이 통치하는 지역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는 로마의 오랜 적을 대파할 꿈에 부풀어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동방의 새로운 실력자와 협약을 맺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도도한 그녀는 몇 번의 압력적인편지가 온 후에야 몸을 움직.. 더보기
동방의 군주 로마에서 귀환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많은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 시노에의 사주를 받은 찬탈자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행세를 하여 혼란을 야기시키는가 하면, B.C. 42년과 41년에는 나일강의 물이 말라 기근과 페스트가 번졌다. 그러나 여왕은 무엇보다도 국제 정세에 신경을 써야 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충돌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펼치는 이집트 정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죽고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는 어머니 곁에서 파라오로 등극했다. 그리하여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이 유일무이한 통치자가 되었다. 분열된 로마, 그리고클레오파트라의 현명함,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더보기
클레오파트라의 승리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된 새 파라오는 겨우 10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으므로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었다. 그녀의 여동생 아르 시노에는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 카이사르는 3개 군단의 로마 병사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 여왕을 보호하게 하고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또 전쟁 중에 자신을 지지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들에게 시가지의 오른쪽 구역을 할당해 주었다. 승리를 거둔 클레오파트라의 군대 승리한 로마의 집정관 카이사르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나일강을 따라 호화롭고 긴 유람을 떠났다. 사랑의 도피여행이었을까. 아니면 나라를 정탐하고 지방 실력자들을 접견하려는 정치적 여행이었을까? 클레오파트라는 5월에 임신을 했고 카이사르도 마침내 동방원정을 위해 떠났다. 그는 원정중 왔노라.. 더보기